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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경제학자(1) - 애덤 스미스

by 포리phori 2022. 5. 7.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경제학의 아버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인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탐구"는 흔히 국부론으로 불리는데 이는 최초의 현대 경제학 저서로 여겨집니다.

애덤 스미스는 고전 자유시장 경제 이론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는 노동의 분업 개념을 발전시켰고, 합리적인 자기 이익과 경쟁이 어떻게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윤리 철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이어져 글래스고 대학교 논리학 강좌 교수, 도덕 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1759년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 강의의 일부를 구체화해 '도덕 감정론'을 출간했습니다. '도덕 감정론'은 인간의 도덕이 어떻게 대리인과 방관자, 혹은 개인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사이의 동정심에 의존하는지에 관해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도덕 감정론'은 앤드루 밀러, 알렉산더 킨케이드와 공동 출판한 저서입니다. '국부론'이 스미스의 대표 저작으로 알려졌지만, 스미스 자신은 '도덕 감정론'을 우월한 작품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스미스는 도덕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양심은 사람들이 "정서의 상호적 공감"을 추구하는 역동적이고 상호 작용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국부론'이 출간된 후 스미스가 큰 인기를 끌면서 많은 부유한 학생들이 스미스에게 배우기 위해 글래스고 대학교로 왔습니다.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승승장구하던 스미스는 찰스 타운젠드로부터 의붓아들 헨리 스콧, 부클레오치 공작의 가정교사 제의를 받았습니다. 스미스는 개인교습을 위해 스콧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고자 했고, 이 기간에 스콧에게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그가 받은 수입은 이전 수입의 약 2배였습니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돌아보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국부론'입니다.

'국부론'의 핵심은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 최초의 체계적 저서로, 이후 여러 학설의 바탕이 된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한 스미스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정부의 역할을 소극적인 경찰관의 지위로까지 낮춘 야경 국가론을 펼쳤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의 필수적인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는 다른 나라의 폭력과 침략에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

2) 국가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법 제도를 엄격하게 세워야 한다.

3) 국가는 사회 전체에는 큰 이익을 주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비용을 보상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는 공공사업과 공공기구를 건설하고 유지해야 한다. (공공재)

애덤 스미스는 중상주의도 비판하였는데, 중상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부는 금은화폐의 보유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작업 능률에 비례하고,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필수 요소가 바로 분업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농업만이 유일하게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며 상공업은 비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하던 중농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짧게 비판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만큼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노동 가치설'입니다. 모든 부가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와 달리 애덤 스미스는 가치척도 수단으로써의 노동 가치에 주목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각국 간 생산물 가치를 금처럼 불안정한 측정 수단보다는 안정적 척도인 노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부론' 성공 이후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관세청장에 임명되어 에든버러 카농가테의 판무레 하우스에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후 글래스고 대학교의 학장까지 지냈습니다.

스미스는 1790717일 에든버러에 있는 팬뮤어 하우스에서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카농가테 키르키아르에 묻혔습니다. 임종 때 스미스는 더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한 것에 실망하였다고 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이유는 여성 공포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연애를 안 한 것은 아니고 세 명의 여성과 얽힌 적은 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죽기 전에 미발표된 많은 글을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요청했습니다. 친구들이 묻자 너무 부끄러운 저작이라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임종 때가 되자 스미스는 친구들에게 내 눈앞에서 태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친구들은 20권 분량의 글을 모두 태웠습니다. 이를 본 스미스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애덤 스미스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사상은 서구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를 극단적인 시장 자유주의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는 당시 중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개인보다는 시장에 맡기면 부패한 정부가 독점하지 않겠냐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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